2016년 7월 26일 화요일

하얀 화살 3 (마지막)













*


  아주 먼 옛날, 어느 날 들판에 한 여자아이가 생겨났다. 그는 부모도 이름도 나이도 몰랐다. 하늘에서 학이 날아와 날개로 덮어주었고, 물어다 주는 열매를 먹고 살았다. 우연히 사람들에게 발견된 그는 마을로 내려가 백씨부인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부인은 아이를 오늘이라고 불렀다.

  오늘이는 왜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엄마 아빠가 있는데 자기만 혼자인지 궁금했다. 궁금하고 그립고 슬픈 마음은 그가 자랄수록 깊어만 갔다. 혼자라면 어떻게 생겨났는가? 부모가 있다면 어디로, 어떻게 된 일인가? 세상은 너무나도 큰데, 어째서 자기만 혼자라는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백씨부인은 오늘이를 불러놓고 간밤의 꿈 이야기를 했다. 꿈에서 오늘이 부모를 보았는데, 하늘의 원천강을 지키고 있더라는 얘기였다. 이에 오늘이는 원천강에 간다며 나섰다.

  백씨부인은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 가느냐며 말렸지만, 엄마 아빠가 하늘에 갈 수 있었다면 자식인 자신은 왜 못 가겠느냐며 듣지 않았다. 오늘이는 오히려 길을 알려 달라며 백씨부인을 붙잡고 매달렸다. 부인은 말리다 지쳐 결국 첫 길을 일러 주었다. 남쪽 흰모래밭을 찾아가면, 별층당에 글 읽는 도령이 있을 테니 물어보면 될 것이라고.

  오늘이는 곧장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과연 내내 걸으니 흰모래밭이 나왔고, 별층당이 보였다. 별층당을 올라가니 책 읽던 장상도령이 일어나 인사했다. 둘은 서로 인사하고 통명을 했다. 오늘이는 원천강으로 가는 길을 물었고, 장랑도령은 서쪽으로 가다 보면 연화못이 보일 텐데 그 곁에 연꽃나무가 있으리라고 했다. 연꽃나무에게 다음 길을 물으면 될 것이라면서, 장상도령은 오늘이에게 하나 부탁을 했다. 왜 자신은 어디 가지도 못하고 매일 별층당에 앉아 책만 읽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마고 약속하고 오늘이는 다시 길을 떠났다.

  서쪽으로 계속 가니 과연 드넓은 연못이 보였다. 오늘이는 바삐 황모래 깔린 연못가로 갔다. 연꽃나무 한 그루가 크게 섰는데, 맨 윗가지에 연꽃 한 송이가 화사하게 피어 향이 진동했다. 오늘이는 연꽃나무에게 조심스레 원천강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연꽃나무는 검은모래밭을 지나 청수바다로 가면 이무기가 있는데, 그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알려주며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자신은 항상 한 가지에서 꽃을 한 송이만 피우는데, 다른 가지에서는 어떻게 꽃을 피울 수 있는지 오늘이 원천강에서 알아다 주면 좋겠다고. 오늘은 역시 그러마고 약속한다.

  검은모래밭을 지나 청수바다에 이른 오늘이에게 이무기가 나타난다. 길을 묻는 오늘이에게 이무기는 다른 이무기들은 여의주를 하나만 물고도 용이 되는데, 왜 자신은 셋이나 물어도 감감무소식인지 알려준다면 원천강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오늘이는 원천강에 가서 이유를 알아다 주겠다고 약속한 후 이무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 이무기는 오늘이를 뭍에 내려준 뒤, 이대로 쭉 가면 흰모래밭이 나오는데, 그곳에 별층당이 있으니 글 읽는 낭자에게 다음 길을 물으라고 일러준다.

  그말대로였다. 오늘이는 장상도령이 있던 곳과 똑같이 생긴 별층당을 발견한다. 올라가 보니 정말 어떤 낭자가 글을 읽고 있었다. 둘은 인사를 나누고 통명을 한다. 오늘이는 원천강으로 가는 길을 묻고, 내일 낭자는 길을 계속 따라가면 우물과 물 긷는 선녀들이 있을 텐데, 그들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가르쳐 준다. 그러고는 자신은 이곳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글만 읽기도 이미 오래인데, 언제쯤 이 일이 끝나는지 원천강에서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오늘이는 다시 길을 나서서, 마침내 우물가에 이른다. 우물가에는 땅에 나뒹구는 두레박과 주저앉아 우는 선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본디 천하궁의 시녀였는데, 물 긷기를 소홀히 한 죄로 이곳의 우물물을 다 퍼내야 하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두레박에 구멍이 뚫렸으니 아무리 물을 퍼내야 별무소용이었다. 오늘이는 달 덩굴을 뭉쳐 두레박의 구멍을 막고 송진으로 완전히 봉했다. 선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물물을 전부 퍼올렸다. 오늘이는 원천강으로 가는 길을 묻고, 선녀들은 잠시 망설인다. 길을 몰라서도, 알려줄 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반드시 원천강에 가야만 하느냐는 물음에, 오늘이는 단호히 그렇다고 답한다. 선녀들은 직접 오늘이를 원천강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원천강은 하늘 위의 강으로, 세상 모든 계절의 처음이다. 원천강의 물로 서천화원의 꽃들이 자란다.

  하늘 높이 뜬 채로 멀리서 빛나는 원천강의 궁을, 오늘이는 아득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선녀들은 착잡히 얘기해 주었다, 날지 못하는 사람은 원천강에 갈 수 없다고. 자신들조차 저쪽 길로 한참을 걸어서 천하궁까지 갈 수 있을 따름이라고. 이곳은 이미 하늘인데 원천강은 하늘 위의 강이라고. 드높은 성벽이나 살기등등한 문지기 같은 것도 없었다. 문이나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저 멀리 드높이 있을 뿐이었다.

  백정은 이야기를 멈췄다. 안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문제가 나오기 전이었지만, 안개는 자신이 답을 모른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문제를 내 주마.

  안개의 눈에 비친 백발 백정은 갑자기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안개는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피투성이 세상에서 한 마리 소를 잡고 잡고 계속 잡으며 간신히, 끈질기게 살아남아온 백발 계집 백정을. 얼마나 오랫동안 홀로 견뎌 왔을까. 가슴이 아팠다. 안개는 그의 손목을 잡고도 싶었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진짜든 아니든 상관 없으니까 그냥 언니라고, 엄마라고 불러보고 싶었다. 피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이런 마음은 이미 피보다 붉었다.

  문제를 풀지 못하면 벌이 내릴 거다.

  안개는 고개를 저었다. 백정은 손을 뻗어 안개의 손목을 잡으려다 그만두었다.

  하지만 답을 찾게 되면.

  심장은 날뛰는데 눈은 바싹 건조하다. 안개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답 같은 거 몰라.

  나를 찾아와 주면 좋겠구나. 그때쯤 난 아마 다 잊었을 거니까. 다시 기억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

  안개는 머리를 푹 숙였다.

  어떻게 해야 오늘이 원천강에 갈 수 있을까.

  빛나는 일. 빛나면 죽는 일. 빛을 삼켜 꺼뜨려야 목숨은 살려 준다는 검은 눈들.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광채를 찾던 굶주린 움직임들. 왜 그저 사는 것조차 그대로 살 수도 없다고 하는가. 그런 건 누가 결정하는 일인가.

  풀지 못하면 안 되는 일이다.

  안개는 멍하니 있었다. 백정이 제 머리칼을 얼마간 자르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는 동안. 붉은 선이 공기 중에 적히고 잘린 머리칼들이 일선으로 길게 떠올라 늘어서는 동안. 그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징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담긴 전심으로 감싸여진다는 것을. 자신의 안전을 위해 백정은 아마도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렸으리라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능력도 없는 자신을 위해 왜 백정의 광채가 타올라 마침내 확 꺼져야 하는지, 그것조차 안개는 알 수 없었다. 빛이 사방팔방 둥글게 가까워졌고 드디어 세상이 급속히 접혀 들어갔다. 날아가렴. 아득해지는 귓가로 스러진 소리가 안개에게 들린 백정의 마지막 말이었다.





  *




  어느 밤, 흰 여우는 도라지꽃 흐드러진 산중에서 소금 인형을 발견했다.

  둘이 처음 만난 날 해가 지자 인형은 사람으로 돌아왔고, 여우를 보고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하늘에 달은 여전히 없었다. 사람이라기에는 조금 달랐는데, 안개는 항상 희게 빛났다. 여우는 안개가 빛나는 것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안개는 자신이 받은 문제를 여우에게 얘기해 주었다. 여우는 같이 문제를 풀어보자고 했는데, 자기는 사람이 꼭 되고 싶다고 했다.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어째서냐고 안개는 물었고, 여우는 붉은 용과 사람, 달과 용 백정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안개는 자기는 모르는 얘기라고 했고, 여우는 제자리에서 한 번 폴짝 재주를 넘은 뒤, 아주 오랜 옛날, 자신이 어쩌다 사람이 꼭 되기로 한 언약을 맺었는지 풀어놓았다.

  아주 오랜 옛날, 아주 먼 곳에 어떤 용 백정이 살았다. 그에게서 꽃과 용, 나라의 멸망과 흰 여우가 도래한 옛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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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검으로 이어집니다.

2016년 7월 20일 수요일

하얀 화살 2



*










  안개가 백정의 광에 출입하게 된 것은 달퀴풀을 캐다가 준 지 일 년이 되어서였다. 그믐밤 백정은 막칼 한 자루만 들고 뒷마당으로 갔다. 검은 나무가 뒷마당에 한 그루 더 있었는데, 그 나무를 중심으로 울타리에 천막을 친 곳이 그럭저럭 광이자 도축장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머뭇대는 안개에게 속에서 뭘 해? 하는 소리가 들렸고, 안개도 곧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소가 서 있었다. 항상 백정을 태우고 다니는 소였다. 바닥에는 달퀴나물과 쑥이 가득 깔려서 온통 달고 쓴 냄새가 가득했다. 의자나 선반 같은 것은 없었고, 항아리 하나가 전부였다.

  백발 백정은 소와 안개를 마주하고 섰다.

  너는 사람이 아니다.

  소도 안개도 눈만 깜박였다.

  우리가 사람이었다면 이곳은 아주 어두웠겠지.

  그 말에 안개는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로 어둡지 않았다. 애당초 너무 깜깜해서 뭐가 잘 보이지 않은 적 자체가 없어서, 안개는 백정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상은 잠시라도 지나치게 어둔 적이 없는데?

  백발 백정은 소 쪽으로 손을 까딱였다. 소는 기다렸다는 듯 성큼 나서서 천막 구석으로 가 섰다. 백발 백정은 안개더러 좀 뒤로 물러서라고 한 뒤 막칼을 들어 소의 배에 꽂았다. 소는 그대로 넘어가 쓰러졌다. 바닥의 풀들이 들썩였다.

  피는 나지 않았다. 백정은 소 배에 꽂힌 칼을 길게 죽 그었다. 사과가 반으로 잘리듯 배도 잘 잘렸다. 그는 칼을 뽑아 옆에 두고서 양손을 뱃속에 쑥 넣어 솥뚜껑 열듯 훌렁 뒤집었다. 속은 텅 비었다. 내장도 뼈도 핏자국도 없었다. 붉은 내면은 안개가 멀찍이서 보기에도 부들부들한 것이 마치 비단 같았다. 백정은 소 뱃속에 달퀴 풀을 집어 쌓았다. 항아리에서 흰 가루를 한움큼 꺼내다 그 위에 뿌렸다.

  소금이다.

  아.

  한 번도 소금을 직접 본 적이 없었던 안개에게는 신기할 뿐이었다.

  백정은 종이 접듯 살점을 척척 접어 석석 잘랐다. 뱃살, 등살, 가슴살, 어깨살, 다리와 목과 머리가 차곡차곡 쌓였다.

  들어와라.

  곧 천막 속으로 황소 한 마리 걸어 들어왔다. 백정은 소가 짊어진 항아리 속에 고기를 차례차례 넣고서 등을 한 번 탁 쳤다.

  이제 가자.

  백정과 안개, 황소와 황소를 짊어진 황소는 백정촌 입구까지 나아갔다. 그믐마다 검은 관을 쓴 자에게 돈과 쌀섬을 받고 고기를 넘긴 후 셋은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에 한 번씩 백정은 소를 잡았다. 소를 잡으면 또 소가 들어와 짐을 졌고, 그 소를 다음 달에 잡으면 또 소가 들어와 짐을 졌다. 안개는 그게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몰랐지만 어쨌든 매일 열심히 달퀴풀을 캤다.

  그러던 어느 밤, 달이 뜨지 않았다. 백정은 그 밤부터 안개더러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아침에도 낮에도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다. 그도 안개도, 수상한 바람이 성 안에서, 밖에서, 백정촌까지 번져 술렁이고 수군거리는 기미를 잘 알았다.

  안개는 때때로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누군가 꿈에서 비명을 지른 것인지, 밖에서 비명을 지른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 달에는 도축도 없었다. 안개는 매일 쌀죽이나 끓였고, 소는 어디 밖에서 돌아다니며 풀을 뜯고 질겅대며 들어올 뿐이었다. 어떤 불편한 긴장감이 성에서부터 짙게 뻗쳐 내려왔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백정은 다음날 안개를 불러놓고 도망쳐야 하니 짐을 싸라고 했다. 무엇 때문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아무튼 안개는 잽싸게 짐을 쌌다. 옷가지며 식기, 돈주머니 정도 챙겨서 소에 얹는데 뭐가 머리에 턱 얹혔다. 올려보니 백정이 자신에게 무슨 너른 모자 같은 걸 씌웠는데, 검은 천이 줄줄 내려와 온몸을 다 덮었다. 백정도 비슷한 걸 썼다. 그는 소에 올라타 앉은 후 안개를 번쩍 들어올려 앞에 앉혔고, 소 목의 방울을 뚝 떼어 버렸다.

  백정과 안개를 태운 소는 백정촌을 나서서 산으로 들어갔다. 소는 산길 대신 풀 헤치며 나무 사이로 갔다. 산 중턱쯤 이르렀을 때 멀리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돌아보려는 안개의 어깨를 백정의 손이 가만히 두드렸다. 그래도 귀로는 들을 수 있었다. 비명 소리, 어린 여자애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였다. 말발굽 소리와 칼날 소리, 돌벽 무너지는 소리. 갑옷 척척대며 흔들리는 소리. 쓰고 매운, 숯과 향이 뒤섞여 타는 냄새. 먹에 젖은 붓이 종이를 적실 때 내는 냄새. 붙잡혀가는 계집애들과 막아서다 칼에 베어 죽거나 밀려나 우는 어미, 땅을 적신 소, 돼지의 피.

  그만 봐라.

  안개는 백정의 목소리에 문득 깨어났다.

  잘은 아니라도 제관들도 볼 수 있어. 괜히 꼬리 잡힌다.

  왜 저러는 건데요?

  찾는 거지.

  뭘요?

  달.

  멀지 않은 곳에서 물 소리가 났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계곡이 나왔다. 백정은 소를 멈추고 내렸고, 안개더러는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계곡을 따라 조금 더 걸어 올라갔고, 곧 나뭇가지와 풀과 바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안개는 소 목을 끌어안고서 가만히 백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비명소리는 이제 멀어졌지만, 허공에 아직 얼얼한 통증이 남아서 끈질기게도 울리고 또 울렸다. 그 끝으로 마치 연이 날아오르듯 투명한 끈 같은 것이 하늘에서 휘몰아쳤다. 밧줄 같기도 하고, 비에 푹 젖은 성의 깃발 같기도 했다. 바로 머리 위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안개는 하마터면 소에서 떨어질 뻔 했다. 하지만 잘 들어보니 새 소리였다. 안개는 빼꼼 위를 보았다. 흰 학 한 마리가 나무에 앉아 연신 날갯짓을 한다. 나뭇잎 뚝 뚝 졌다.

  날 가려주려고?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안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감으니 하늘에서 일렁이는 흰 뱀 같은 것들이 좀 더 잘 보였다. 학의 그림자는 선홍색으로 연신 돌아갔다. 학뿐 아니라 참새, 비둘기, 딱따구리, 멧새, 까마귀 할 것 없이 새란 새의 그림자란 그림자는 모두 검은 하늘과 흰 땅의 이곳저곳에서 붉었다. 그런데 하늘. 하늘은. 안개는 눈을 번쩍 떴다.

  소가 천천히 움직였다. 학은 멀리서 둥글게 돌며 날았다. 천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검은 모자가 끌려 떨어졌다. 잡으려 했지만 늦었다. 안개는 일어나 앉으려 했는데, 그때 큰 천이 온몸을 덮었다.

  소리 내면 안 된다.

  그렇지만 하늘에-.

  백발 백정은 겉옷으로 덮은 안개를 어깨에 짊어지고서 동앗줄을 팔꿈치와 손목에 둘러 감았다. 그의 눈앞에는 아래로 아래로 붉은 절벽이었다. 반으로 잘린 듯한 산의 단면이 붉게 한없이 떨어지는데, 멀리로는 구름이 편편이 떠돌았고 가까이로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폭포로 미끄러져 내렸다. 소는 돌아서서 다른 길로 멀어졌고, 백정은 끈 한 줄에 의지한 채 절벽 아래로 척척 내려갔다. 나는 새들의 그림자가 그의 귓볼로, 어깨로, 등으로, 발꿈치로 지나갔다. 백정은 절벽을 한참 타고 내려가다가 속이 움푹 파인 곳을 발견하고 천천히 안으로 기울어지듯 들어갔다.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얕았지만 가는비 정도는 피할 만했다.

  그는 안개를 내려놓고 천을 걷었다. 흰 빛이 물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새 더욱 밝아졌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고, 붙잡히지 않을래야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바깥은 위험천만한데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리둥절하니 눈부시기만 한 안개를 어찌해야 좋을지, 그도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숨긴다고 하늘의 일이 대충 괜찮아지나? 시간을 끈다고? 그러면 섬월국의 방방곡곡에 도사린, 피에 굶주린 제관들이 포기를 할까? 사라진 달이 돌아오기라도 하나?

  백발 백정은 문득 자신의 팔목을 보았다. 그 역시 버려져 백정촌에서 되는 대로 자랐다. 그를 주워 키운 할미 덕분에 어려서는 숨어 자랐고, 좀 커서는 매달 보름마다 짐승의 피로 목욕을 했다. 그러면 그달에는 빛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굳이 피 없이도 어느 정도 억누를 수 있게 되었다. 심장이 짓눌리는 느낌이었지만 할 수 있었다. 그런 걸 알려주어야 하나? 일단은 살아남아야 하니까, 광채를 꺼뜨리라고. 반쯤만 죽으라고. 아니면 지금껏 해온대로 백정촌의 흙과 안개의 머리칼, 자신의 피 몇 방울과 달퀴풀 약간을 뭉쳐 불에 태우는 술수로 사람들의 눈이라도 속이면서- 그것도 이제는 할 수가 없다. 제관들이 나섰으니. 그렇게 천시하던 백정촌까지 뒤집어 엎을 줄이야, 이렇게도 빠르게.

  아니다. 이제 더는 달이 없다. 섬월국의 뿌리부터 기이하게 일렁이는데, 천관단의 제관들은 눈에 불을 켜고 무언가를 찾는다. 백정은 때때로 섬월국의 곳곳에서 찬란한 아이들이 태어나는 일을 잘 알았다. 그런 아이들은 버려져 죽거나, 운이 좋으면 자신처럼 살아남아 버티다가 어둑해지든가, 제관들에게 발견되어 잡아 먹힌다. 오래 키우면서 조금씩 피를 빼려 시도한 자들은 다 실패했다. 아이가 더는 빛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에, 뭐가 뭔지 모를 때, 짐승처럼 도축해서 머리칼부터 발톱까지 남김없이 다 먹는다. 안개처럼 멀쩡하게 자라난 경우는 아마 지금껏 없을 것이다. 하필 이런 때, 하필 이런 곳에서.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백정은 깊이 생각하느라 안개가 하는 말을 잘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하늘에, 달이 있던 자리에 뭐가 있어요. 누군가 서성대면서.

  문제를 내주마.

  백정은 달의 일은 안개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대로 달이 돌아오지 않아 세상이 기울어 망한들, 끓어올라 넘친들, 붉은 용의 예언대로 섬월국이 통째로 가라앉는들, 자신이 어찌 해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마도 안개라면, 어쩌면 안개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네가 아니면 풀릴 수 없는 게 있다.

  어떤 고아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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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을 기다려 주세요...

하얀 화살 1


하얀 화살
1








  소금 인형과 여우는 항상 같이 다녔다. 낮에는 여우가 인형을 꼬리로 말고 다녔고. 밤에는 인형이 사람 모습으로 화하여 여우를 데리고 다녔다.

  소금 인형은 본시 사람이었는데, 어려서 흰머리 백정에게 받은 문제를 풀지 못해 영영 낮에는 소금 인형이 되는 벌을 받았다. 여우는 본시 사람이 되길 원해 이슬만 먹으며 구도하던 중에, 도라지꽃 아래 누운 소금 인형을 발견하고 물고 다녔다.

  둘이 처음 만난 날 해가 지자 인형은 사람으로 돌아왔고, 여우에게 자기가 받은 문제를 알려 주었다. 여우는 이 문제를 같이 푼다면 자기는 사람이 될 것이고, 너는 벌에서 풀려날 것이라며 함께 궁리해 보자고 했다.

  소금 인형이 사람이었을 적 이름은 안개였다. 안개는 고아였고, 마을이나 사람 있는 곳에는 얼씬도 않고 혼자 산에서 살았다. 산에서 먹고 자고 했으며, 간혹 약초를 캐다가 기방이나 약방에 주고 옷가지며 음식을 받아오는 일은 있었다.

  안개에게 부모는 처음부터 없었다. 아무 기억조차 없었다. 안개가 기억하기로는 자신은 아주 어릴 적에 시장통에서 헤매고 다녔던 것 같았다. 같이 다녔던 거지 아이들 얼굴도 기억 안 났다. 그나마 그때 말은 배운 모양인지, 필요하면 말이 나오긴 나왔다. 잘, 많이 말하기는 어려웠다. 가끔 기방에 갈 때마다 반겨 주는 언니들이 저들끼리 왁닥그르 얘기할 때면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싫은 것은 아니지만 힘들었다.

  안개가 흰머리 백정을 만난 것은 만월밤 약수터 앞에서였다. 그는 허옇게 센 백발을 대충 틀어올려 나무 비녀로 꽂았고, 치마저고리 대신 대바지 하나만 달랑 입은 채였다. 막 소세라도 했는지 머리며 얼굴이며 가슴까지 다 희게 젖었는데 눈만 시퍼렇게 번득였다. 한 손에는 팔뚝만한 막칼을 쥐었는데, 안개를 보더니 그냥 내려 놓았다.

  이 산에는 범이 없다더만.

  그러고는 그는 뒷편을 향해 이제 그만 가자! 하고 소리쳤다. 또 누가 있나 싶어 긴장한 안개 앞에 느적느적 나타난 것은 온갖 짐은 다 짊어진 황소 한 마리였다. 소는 역시 느리게 가서 주인 앞에서 몸을 낮추었다.

  달퀴풀 좀 뜯어 오너라.

  안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에게 말한 것인지, 소에게 말한 것인지 알게 뭔가.

  백정촌 어딘지 알지? 담 보름까지 달퀴풀 한 바가지 뜯어 와.

  그는 막칼이며 젖은 저고리며 대충 둘둘 말아 봇짐 사이에 끼워 넣고서 소에 앉았다. 소는 역시 천천히 일어나 천천히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안개는 딱히 밑도끝도 없는 그의 말에 따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였는데, 백발 백정을 만난 후 산의 분위기가 묘하게 뒤숭숭했다. 오다 가다 달퀴풀이 자주 눈에 띄기도 했다. 어차피 이미 본 것은 캐내어 흙을 떨어내면서도, 안개는 굳이 산을 돌아 내려가 백정촌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자꾸 바람이 이상하게 불었다.

  바람이 부는 법은 여러가지이다. 밤 바람은 기름 같이 부들거리고, 그런 가운데 방울 방울 빛나는 터짐이 멍하니 흩어져 간다. 밤 바람이 새벽 바람으로 넘어갈 때면 입김 같이 약간은 무거워지지만 동시에 맑아진다. 하루를 둘로 보자면 무겁고 부드럽고 아득한 밤 바람과 가볍고 쨍 하니 청살스런 낮 바람으로 나눌 수 있다. 예외라면 폭풍이 불어올 때다.

  폭풍이 불기 전에는 온 산이 숨을 죽인다. 깃털바람 한 줄 날지 않는다. 자잘한 바람은 이미 다 먼 곳으로 불려갔다는 뜻이다. 공기를 메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어떤 뜻이다. 바람보다 더 크고, 바람을 제 맘대로 부리며, 바람을 토해내고 삼키는 어떤 확확한 뜻이다. 안개로서는 그걸 어떻게 불러야 할 지 알 길은 없었다. 어떤 차가운 불 같은 느낌이었다. 그게 산보다, 마을보다 더 커서 하늘의 이편과 저편까지 다 뒤엎어 버리는 것이었다. 폭풍이 오기 전에는 실바람이 꼭 그렇게 분다. 부름에 쪼르르 달려가는 어느 집 종처럼 냉큼 달려가 버린다. 나무를 휘감고 돌거나 나는 새의 깃털을 쓸거나 하지도 않고, 곧장 간다.

  안개가 백발 백정을 만난 날부터 줄곧 그런 바람이 불었다. 하루, 이틀, 사흘 째부터는 안개도 점점 조바심이 났다. 그럴 이유도 없었지만 그냥 초조했고 불편했다. 오며 가며 캐어 둔 달퀴풀이 얼추 한 바가지 쯤 되었을 때 안개가 결국 백정촌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더는 마음이 껄끄러워서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정촌은 서문 밖에 있다. 백정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짐승은 백정촌에서 죽고, 살점과 뼈와 고기는 상인들이 와서 사다가 성 안 시장으로 가져간다. 안개는 백정촌까지는 쉽게 갔다. 그런데 막상 근처에 다다르자 이제 그 백발 백정 여자를 어떻게 찾아야 할 지 알 길이 없었다. 고민은 빨리 끝났는데, 황소 한 마리가 안개한테 다가왔기 때문이다.

  안개는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정촌을 둘러친 짚풀떼기 울타리와 근처 몇 안 되는 염소, 그 곁에 멍하니 주저앉은 어린애 한 둘, 황소 한 마리. 먼지 뿌옇게 일어났고 가라앉았다. 햇살이 희게 따가웠다. 집 같이 보이는 검은 것들은 햇빛 아래 아련하게 흩날리듯 했다. 이윽고 소는 느리게 돌아서서 먼저 갔고, 안개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갔다.

  먼지와 비린내가 물결처럼 일었다. 한낮의 열기가 살갗에 착 달라붙어 텁텁했다.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자 그나마 그늘이 여기저기 그여 조금 시원했다. 안개는 백정촌이 신기했다. 마을이지만 마을 같지 않았다. 집이랄 것이 집 같이 생기지 않았다. 흙벽과 막기와는 그나마 나은 편이고, 판자나 풀더미, 아예 그조차 없어 지붕이 뻥 뚫린 집도 있었다. 똑바로 선 벽은 거의 없고 대부분 금방이라도 물러질 듯 기울었다. 나무 둥치에서 둥치까지 대충 돌 쌓고 흙 발라 만든 집도 많았다. 때때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중 신발 신은 애는 하나도 없었다. 가장 안개의 눈길을 끈 것은 벽이든 지붕이든 바닥이든 걸려 있거나 덮여 있거나 질펀히 깔린 달퀴풀과 쑥, 백사초였다. 백정촌이라는 곳은 아무래도 반은 산 같고 반은 마을 같은, 산과 마을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곳 같았다. 골목길을 돌고 틀고 한없이 돌아 들어가서야 소는 마침내 멈춰 섰다.

  검은 집이었다.

  안개는 우뚝 멈추어 섰다. 산에서 오래 살아온 안개로서도 검은 나무는 처음이었다. 잎까지 다 검은 나무가 두 그루였는데, 그 사이에 검은 판자를 대어 벽을 삼은 집이었다. 딱히 문은 없고 판자 중간 트인 부분에 대충 삼베 조각이 치렁 치렁 걸쳐 있었다. 안개는 소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좀 늦게 눈치챘다. 어쨌든 더는 가기 싫었다. 안개는 달퀴풀 바가지만 슬그머니 소 옆에 내려 놓았다. 기왕 가져온 거니까 그냥 두고서 산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돌아서는데 뭐가 탁 엎어졌다. 안개는 엎어진 바가지와 흩어진 달퀴풀, 소를 돌아보았다.

  너.

  안개는 막 손가락으로 소를 가리켰고, 소는 엎어진 바가지를 앞발로 다시 턱 밀어 쳤다. 역시 안개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랬다. 너 뭐야, 라고 말하려는데 또 가서 바가지를 또 찬다. 안개는 울컥 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소까지 왜 이러나. 그때 백정이 작대기로 삼베 자락을 밀어 걷었다. 뿌연 연기가 뱀처럼 흘러나왔다.

  뭐하냐, 얼른 들오지 않고.

  안개는 그렇게 어쩌다 보니 백발 백정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산에서 살 때보다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안개는 처음에는 긴장도 되었지만 막상 살아 보니 그냥 평온했다. 그는 매일 달퀴풀을 캐어다가 백발 백정에게 가져다 주었고, 잡일을 도왔고, 그뿐이었다.

  사실 전보다 많은 일이 쉬웠다. 크게는 먹는 일, 잠자는 일이 편했고, 사소하게는 옷이 한 벌에서 세 벌로 늘어났고, 모기나 빈대에 물리는 일이 크게 줄었다. 백정네 집은 항상 약초로 가득해서 벌레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정은 도축이나 고기에 관련된 일은 집 뒤 따로 떨어진 광에서 혼자 처리했다. 안개는 가끔 마을 곳곳에서 짐승 우는 소리를 들었지만, 백발 백정이 일할 때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안개는 백정네에서 삼 년을 살았다. 더 오래 있을 수 없었던 것은 천관단에서 무녀를 찾기 위해 사람을 풀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무녀를 찾으려 들었냐면 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무녀를 찾는다고 달이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었고, 애당초 왜 달이 사라졌는지 알 길도 없었고, 아무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점괘는 자꾸만 달의 주인을 찾으라고 나왔다. 점괘가 무슨 뜻인지 아는 이는 없었지만 아무튼 섬월국의 왕은 천관단을 통째로 들들 볶았고, 천관단의 모든 제관들은 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섬월국은 변방의 소국이었고, 크게 돌아가는 천하의 흐름에 단 한 번도 관여한 적 없었다. 남이 욕심낼 만한 자원도 없었고 지리상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바도 없었고 딱히 대륙과 자주 왕래하지도 않았으며, 대륙 쪽에서도 섬월국에 별 관심이 없었다.

  섬월국은 스스로를 태초에 가장 처음 생겨난 나라라고 기록했다. 나라의 시조인 금이적은 바다에서 태어났는데, 한날 한시에 함께 태어난 적룡을 토막내어 죽여 살은 땅으로 삼고 피는 강으로 삼았다. 뼈는 왕궁의 대들보로 세우고, 비늘은 기와로 얹고, 발톱은 천관단의 제관에게 넘겼다. 심장은 하늘로 던지니 그대로 달이 되었다. 태양뿐이던 하늘에 달이 생겨난 것은 섬월국이 생겨난 덕이었다.

  붉은 용이 죽으며 토해낸 구름과 바람이 온 하늘을 덮었다. 천관단을 세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섯 발톱은 산산 부수어 초대 제관들이 나누어 먹었다. 용의 발톱을 먹은 제관은 구름과 바람을 일부 부릴 수 있었다. 왕은 제관들을 섬월국의 곳곳으로 보내어 기상을 다스리게 했다. 문제는 다음 대였다. 풍운을 통제하던 제관이 죽는다면 대책이 없었다. 여러 시도 끝에, 후임이 선대 제관의 피를 마시면 똑같은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장은 그렇게 해결되는 듯 보였지만, 제관의 대가 대를 이을수록 피의 효능이 흐려졌다.

  금이적은 왕좌에 오른 후 삼백 년을 살았다. 제관의 피가 무력해지는 기미를 알아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 날 왕은 일찌기 용의 심장을 드높이 던져 날렸던 염천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안개가 노을과 널크러져 산의 계곡과 폭포를 채우고 따라 흐르는 풍경을 보았고, 노래하듯 떨며 뭉쳐 다니는 바람의 몸집 속으로 걸었다. 염천산의 꼭대기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비를 찾았다.

  섬월국의 첫 왕비는 사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붉은 용처럼 꼭 용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었다. 금이적은 물안개와 석양, 구름 그림자 드리운 호수 한가운데 수월계화 덩굴을 오래 감상했고, 그러던 중 꽃가지 둥글게 엮인 중심에서 은은히 번지는 흰 광채를 눈치챘다. 월계화 사이로 흰 손 천천히 나왔다. 검은 머리채 꽃잎과 뒤섞여 흘렀다. 여인의 흰 나신은 느리게 가시 덩굴을 타고 내려 물에 닿았고, 곧 완전히 호수를 디디고 섰다. 그는 돌아서서 금이적을 마주 보았다.

  금이적은 평생 한 명의 정비와 세 명의 후비, 마흔넷에 달하는 후궁을 두었다. 정비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고, 첫 후비 소생의 장자가 대를 이었다. 왕이 정비를 찾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극히 소중하고 귀하게 대접했으나 자손을 보는 일은 애당초 정비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름마다 중궁을 찾아갔고, 아내의 손목을 칼로 그어 피를 받았다. 옥 그릇이 반쯤 차오르면 지혈하고 보약을 먹였다. 다정하게 백월, 하고 부르며 끌어 안았다. 섬월국의 첫 왕비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월계화 속에서 나와 왕을 만났을 때부터 서른세 해가 지나 숨을 거둘 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왕비의 피는 마치 향유와도 같았다. 월계화를 뭉쳐 짓눌러 짠 것 같은 향기를 풍기는, 달빛이 무겁게 가라앉은 것만 같은 흰 빛의 피였다. 옥판에 몇 방울씩 떨구어 놓으면 이슬처럼 동그랗게 뭉쳤는데 그렇게 하룻밤 두면 단단히 말라 백옥 구슬처럼 되었다.

  금이적은 그렇게 만든 백색 혈주를 모아 매해 각지의 제관들에게 꼬박 꼬박 내려 보냈다. 이번에는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옥함에 넣어 봉해서 모든 천관단 터에 깊이 파묻게끔 했다. 그렇게 서른세 해를 반복했다.

  왕비는 서른네 해의 첫날에 죽었다. 폭설이 내리던 날이었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밭으로 굳이 나가는데 금이적이 말려도 아무 소용 없었다. 결국 붙잡으러 뒤따라 나서는 금이적의 손끝에 왕비의 소맷자락 끝이 잡혔고, 크게 휘몰아치는 한 무리의 꽃잎을 통과해 가볍게 당겨져 왔다.

  눈과 같이 흰 꽃잎이었다.

  옷자락과 꽃잎, 흩어지는 눈 속에는 금비녀와 백옥신 뿐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왕은 급히 꽃잎을 주워 담으려 했지만 바람 난폭했고 함박눈이 눈을 긁어댔다. 휘청이던 순식간에 옷까지 놓쳐 날렸으니 꽃잎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땅을 쳤고, 발을 굴렀고, 분노를 애써 누르며 목 끓는 소리를 냈고, 크게 기침을 터뜨렸다. 뒤늦게 달려온 궁인들에게 부축 받으며 돌아간 후 사흘을 크게 앓았다.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반복해서 잃어버렸다고 중얼거렸다.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아직은 안 되는데, 놓쳐버렸다고 했다. 천년 만년 굳건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을, 그렇게 만들 수 있었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찰나에 날아가 버렸다고, 이제는 길이 없다고, 없다고, 결국 죽어야 한다고, 안된다고, 잃어버렸다고, 끊임없이.

  사흘 후 그럭저럭 일어나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왕은 가장 먼저 후궁을 늘렸다. 이미 귀비가 셋 있었지만 후궁을 마흔넷 더 들였다. 귀비 셋에서는 다섯 아들과 세 딸을, 후궁에게서는 칠십이 넘는 자녀를 보았다. 왕은 딱히 그 누구도 총애하거나 애틋히 여기지는 않았고, 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식으로 부지런히 왕손을 생산했다. 자주 사람을 보내 염천산을 샅샅이 뒤지게끔도 했지만 기이한 안개나 향기로운 바람, 산꼭대기의 호수도, 월계화 덩굴도 모두 꿈인양 온데간데 없이 그저 여느 산과 다를 바 없어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

  세월이 흘렀고 섬월국 왕궁의 주인도 셀 수 없이 바뀌었고 몇 번의 큰 반역과 이변, 전쟁과 봉기가 일어났다. 왕궁은 불타거나 무너지거나 재건되거나 했고, 임금의 성씨도 계속 바뀌었다. 왕이라고 칭했다가 황제를 칭했다가 다시 왕이라고 했다가, 왕을 칭하는 이가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했다. 초대 제관의 후손들이 백정이 되고 백정이 가장 미천한 신분으로 주저앉기에 이르는 시간이었다.

  때로 빛나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기담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향기를 뿜어내는 여인, 하늘을 나는 여인, 미래를 보는 여인, 강 위를 걷는 여인의 이야기는 곧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남자의 간을 빼어 먹는 요괴나 피칠갑한 눈으로 길가에 앉았다가 지나가는 자에게 덤벼들어 피를 빨아먹는 귀신 얘기로 변했다. 갓 태어났는데도 붉기는커녕 달덩이처럼 빛나는 계집아이는 묵묵히 묻히거나 버려졌다. 설령 부모가 숨겨 키우더라도 발각되면 마을에서 쫓겨나 강산을 헤매다 죽든 살든 알아서 할 일이었다.

  안개는 고아였다. 어느샌가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였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어쩌다 보니 살아 있었다. 어려서는 다른 거지 아이들과 시장통에서 살았고, 언제서부턴가 마을에서 나와 산에 들어갔다. 잘 기억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 많은 곳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밤은 어둡지 않았다. 하늘에는 별이 천지였고, 짐승들의 눈도 별 같이 반짝였고, 어둔 것과 밝은 것이 자리를 바꾸어 앉았을 뿐 낮과 다를 것도 없었다. 추우면 나무를 끌어안거나 바위를 등지면 온기가 온몸을 둥글게 감쌌다. 목 마르면 물을 찾아가 마셨고 배고프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풀이나 열매를 먹었다. 어미 따라 달려가는 산돼지나 둥지 속 새끼새를 보면 가끔 왜 자신은 부모가 없는가 싶을 때도 있었다. 눈물이 나면 손등으로 닦았다. 태풍이 몰려오는 밤이면 요동치는 산속에서 속절없이 흔들리며 뛰며 달렸다. 간혹 약방에 내려가는 날이면 마을에 가득한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자신을 보았다. 그건 어떤 할퀴어내듯 밀어내는 힘이었고, 그걸 거꾸로 밀어내면서 약방까지 가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폭설이 오기 전에 두꺼운 솜옷과 가죽신이라도 준비해 두면 훨씬 고생을 덜 했다.

  안개는 어느 만월밤 약수터 앞에서 백발 백정과 마주쳤다. 백발 백정의 맨가슴은 달과 같이 희게 빛났고, 안개 역시 희게 빛났으며, 누군가는 속으로 탄식했고 누군가는 말이 없었다.

  이 산에는 범이 없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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